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네덜란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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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 경기는 일명 마르세유의 치욕, 마르세유의 비극으로도 불리는 경기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1경기에 5실점, 5점 차 이상의 대패를 당한 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개국 본선 때 헝가리에 0:9, 터키에 0:7 대패를 당한 이후 무려 44년 만의 일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경기 중 하나다. 또한 현재까지도 5 : 0의 스코어는 축구 경기에서 참패를 뜻하는 명사로 자리잡힐 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경기이기도 하며, 오대영, 오대빵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기도 했다.[1]
대한민국은 이 경기에서의 대패로 인해 남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 요약[편집]
속수무책이네요.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차범근 감독의 전술은 이미 실패작 수준이었고 선수 기용도 도저히 이해 못할 고집스런 수준이었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2002 월드컵을 대비하여 다음 벨기에전 때 신인 선수들을 포함하는 새 진형을 갖추겠다.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3]
이 경기를 지켜보신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 축구는 꼭 다시 일어설 겁니다. 성원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3. 경기 전[편집]
이변의 드라마를 꿈꾸며 옆의 링크는 당시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이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쓴 기사이다.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은 네덜란드 기자가 최소 2:0 이상 승리를 예상했는데, 다른 외국 기자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한국은 그것이나 기대해 보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해외 축구 자체에 대해 매우 무지하기 짝이 없었으며, 당시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환경도 열악하다 보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나 방송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이른바 뇌피셜만 가득찬 축알못스러운 기사들만 주구장창 골라서 쏟아냈다. 한편 어떤 무속인[5] 은 네덜란드에 3:1로 이긴다고 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네덜란드에 3:1승리 무속인
그나마, 유일무이하게 꿈이나 깨라고 예언 수준으로 예측한 것은 딱 하나 뿐인 시사저널이었다.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나오듯이 시사저널은 '다들 단꿈에 취했는데 한국축구 수준으로 월드컵 16강은 커녕, 1승도 불가능하다.' '잘해야 1무 승점 1점 거둔다.' '이번 월드컵은 승점 1점 1무 2패가 고작이며 네덜란드에게 한국은 4골차 이상으로 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측까지 해 버렸다. 이러자, 시사저널은 당시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하지만, 경기 후에 경악스럽다고 독자들이 뭔 예언이라도 했냐고 반응했다.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고 인터뷰했다. 최용수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 기사들 제목은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44년 한 꼭 16강 간다"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아주 드물게 있긴 있었다. 확실히 상대하는 3개국 중 제일 강팀이 네덜란드라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일본이 0:1로 석패했지만 그나마 선전하는 것을 봤는데다 현지 유럽 언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볼일 없는 모습을 질타하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그렇게 됐을 이유도 있다지만 그 당시엔 2002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양국 정상이 이런 약속을 한 전례가 있었다.
1996년에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 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6][7][8] 이럴 정도였으니 당연히 당시 대한축구협회나 기자들도 지금보다도 더더욱 현실파악을 전혀 못하던 시절이고, 아무래도 욕을 하던 말던 좋던 나쁘던 조회수 유도와 발행 부수 증가와 트래픽 유도를 위하여 일부러 관심성 기사를 써대는 게 예나 지금이나 흔한 기자들이라는 점도 있지만...
유럽 언론은 차범근 전 감독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지 못해 자신을 질타하는 한국 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실망스럽다는 식의 기사를 실었다. 차범근 전 감독 압박 한국 관중들
이때의 네덜란드-벨기에전의 결과는 순수히 양 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 관계를 몰라서 나온 말이다. 비록 당시 벨기에는 대부분 30대가 넘은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사실상 홈팀이었고 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겨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이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던 것이다. 실제로도 1974 FIFA 월드컵 서독,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유럽예선에서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벨기에가 플레이오프 끝에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월드컵에 올라갔다. 그리고 4년 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벨기에가 네덜란드를 잡았다.[9][10][11]
심지어 네덜란드 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 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나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고, 팀 내에 흑백 갈등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12] 정작 차범근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고 말했다.[13]
최용수는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의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반드시 결승골을 넣고 마르세유에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다.[14] 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아무튼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같은 언론의 유언비어 보도를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 네덜란드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때였고, 해외 축구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축구 전문가들 정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른바 축빠들은 흔히 축구 잘 하는 나라라 하면 월드컵 단골 손님들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15] ,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 심지어는 네덜란드가 세계 지도의 어디에 있는지나 어느 대륙에 속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16] 게다가 KBS에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 예선도 몇 경기 골라서 중계해줬고, 축구 잡지 베스트 일레븐에서는 본선 32개국 진출 예상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 스타일까지 소개할 만큼 나름의 정보 제공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계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의 네덜란드 대표팀은 한국 언론들 및 이를 믿었던 한국 국민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일 정도로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갖춘 강팀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성기로는 1974 FIFA 월드컵 서독과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연이어 월드컵 준우승을 이룬 시절,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준우승을 했던 시절 등이 꼽힌다. 전대회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2:3으로 석패했지만, 이 경기는 전반전 내내 0:0으로 팽팽히 맞선 데다가 후반전에 들면서 0:2로 뒤지고 있다가도 곧바로 2:2까지 따라붙는 근성까지 보여주었을 정도로 대회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다.
UEFA 유로 1988 우승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오렌지 삼총사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오렌지 삼총사 외에도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그의 형인 에르빈 쿠만, 얀 바우터스, 제랄트 바넨부르그, 아론 빈테르, 반 티그렌과 골키퍼 한스 반 브루켈렌 등이 포진될 정도로 막강한 스쿼드를 가졌다. 참고로 이때 네덜란드는 유로 대회 직전에 열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자국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이 거스 히딩크 전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면모를 과시해 나름대로는 절정의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스쿼드만 봐도 꽤나 화려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은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마크 오베르마스, 최강의 타겟맨 파트릭 클라위버르트[17] ,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와 프랑크 더부르-로날트 더부르 형제[18] ,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은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재다능한 만능 멀티플레이어 필립 코쿠, 캄펜의 바위라 불리며 강력한 피지컬로 상대 공격수들을 제압하는 수비수 야프 스탐,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된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월드 클래스로 불릴만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포지션 편중은 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골키퍼까지도 완벽했던 것이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다. 한마디로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는 네덜란드 2번째 전성기였던 것이다.[19] 각종 게임이나 TV, 영상 매체로 축구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현 세대 입장에선 당시 각 리그 레전드들을 박박 긁어모은 수준의 압도적인 스쿼드다. 게다가 차범근과는 경험과 능력면에서 매우 뛰어난 거스 히딩크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한국과는 차원이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 대부분은 각각 다른 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1994-19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이뤄낸 AFC 아약스 출신의 멤버들로 조직력 또한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석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이 대회 이후 사임한 것도 저렇게 훌륭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4강 그것도 4위에 그쳐서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네덜란드가 콩라인만 아니었다면 우승을 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스쿼드인 것이다.
물론 상기한 대로 당시는 비단 유럽 축구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무지한 시기였기에[20] 많은 국내의 축구팬에게 네덜란드가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르던 시절이다.[21]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도 자막의 다비즈의 로마자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즈?"라고 잘못 발음했을 정도로 나름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유럽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공격력을 가진 네덜란드는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파라과이, 멕시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모두 5골이나 넣는 가공할 공격력을 보여준 팀이다. 즉, 당시 16강 정도의 전력을 가진 팀을 상대로도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한 것은,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전을 앞둔 한국에 펠레는 컬럼을 통해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어야 하는 경기지만 그렇다고 수비만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며 하지만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이 잘 못하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은 해외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부 국내팬들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경기 전날의 연습 시간에 자신들의 연습 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주지 않고 슈팅 연습을 계속 해댔고,[22][23] 강력하고 정교한 슈팅들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한국 선수들은 0:1로 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는 히딩크의 전략으로,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였다.[24] 게다가 경기날 경기장 분위기도 한국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당시 55,000명의 관중 가운데 60% 정도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고, 한국은 완벽히 원정의 분위기에서 압도당한 채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25]